<특별기고> [APEC]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 그리고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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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5-10-13 12:49본문
나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20여 년 전, 캐나다 드러멈빌에서 열린 세계 민속 댄스 페스티벌에 한국 전통무용팀의 코디네이터로 참여했을 때, 그 믿음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한국 무용 특유의 느린 선(線)의 흐름과 그 안에 담긴 ‘한’의 미학을 바라보던 외국인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우리의 정서를 읽어내고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적인 것이야말로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 언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에서 20여 년간 거주하던 나는 오랜만에 올해 가을, 2025년 9월 한국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고, 특히 이번 경주 방문은 그 확신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으로 찾았던 경주의 희미한 기억을 뒤로하고 3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경주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깊은 울림을 주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품은 도시이지만, 단순히 과거의 유산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 그것을 이어가려는 ‘살아 있는 전통의 도시’였다. 결국 지역의 진정한 자산은 고유한 역사와 문화이며, 그것을 지켜내고 발전시키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새삼 깨달았다.
이번 방문 중 경주엑스포대공원 내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기념관에서 전시된 ‘호랑이까치’를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K-팝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를 떠올렸다. 단순히 전통과 현대를 병치하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가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연결이 전시에 충분히 담기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관광에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이 자주 강조되지만, 실제로 그 연결점을 발견하는 일은 멀리 있지 않음에도 자주 간과된다. 그 실마리는 오리진(origin), 즉 근원을 이해하는 이들만이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 속에 있다. 결국 지역의 정체성과 유산, 그리고 현대 문화가 어떻게 만나는가가 관광 경쟁력을 좌우한다. 경주는 바로 그 무대를 이미 갖춘 도시다.
최근 APEC 2025 정상회의를 앞두고 경주의 곳곳이 분주히 준비하는 모습을 보았다. 보문관광단지에 들어섰을 때 나는 “세계의 정상들을 환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 뒤에서 묵묵히 애쓰는 시민들의 헌신이 회의의 성공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젊은 세대가 지역의 삶보다 서울행을 더 큰 성공으로 여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무거워졌다. 경주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것은 화려한 외형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감과 자부심을 지닌 시민들의 태도다. 외국인을 감동시키는 것도 바로 그 진정성이다. 미국에서 많은 도시들이 쇠퇴된 지역을 다시 살리는 지역 재활성화(revitalization)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 경험을 보며 느낀 것은, 지역 활성화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역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부심과 애정이야말로 그 지역을 진정으로 살리는 힘이다. 경주 또한 그 중심에 있는 사람들—그들의 자긍심과 헌신—을 통해 더 단단히, 더 지속가능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장된 포장이나 보여주기식 개발이 아니다. 경주가 가진 역사와 이야기, 그리고 문화적 자산을 얼마나 진솔하게 드러내느냐가 핵심이다. 새로운 개발과 오래된 유산은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공존하는 관계여야 한다. 뜨는 지역과 지는 지역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 위에 새로운 것을 더해 경주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야 한다.
경주는 젊은 감성과 오래된 감성이 함께 살아 숨 쉬는 도시다.
하루, 이틀, 사흘로는 다 경험하기 어려울 만큼 풍부한 볼거리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정체성이 하나의 ‘경주’라는 틀 속에서 연결될 때, 경주는 더욱 매력적인 세계적 도시로 성장할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던 나에게 이번 방문은 그 믿음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해주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임을—경주는 그 자체로 이를 증명해낼 수 있는 도시다.
2025년 9월 27일
이소정 (미국 아이오와주립대(Iowa State University) 교수)







